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 8월 18일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군에 의해 미군이 2명이나 살해되면서 이를 둘러싼 한반도의 전쟁기운이 최고조로 달아올랐던 날이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판문점 회의장 서쪽 끝 언덕 위에는 유엔사 제5 관측소가 있다. 여기서는 북한측이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으로 들어오는 통로인 사천강 (泗川江) 위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그 다리 앞에 설치된 유엔사 제 3 초소가 한눈에 보인다.
돌아오지않는 다리
처음 이 5 관측소를 지었을 때 북한측은 자신들이 노출된다고 생각했는지 「도발적인 시설」이라고 항의했었다. 당시 UN군측인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5관측소에서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3초소 부근에 약 12m에 이르는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여 이를 제대로 관측할 수 없었고, 북한군에 의한 미군의 납치를 우려하여 이날 가지치기 작업을 수행한 것이었다. 76 년 8 월 6 일 유엔사 전방 지원부대 작업반의 지시에 따라 한국근로부대 (KSC) 소속 근로자 4 명이 경호원들 과 함께 그 미루나무를 베러 들어갔다가 북한측 경비병들의 협박에 쫓겨나왔다.
유엔사 전방 지원부대는 북한 측의 반발을 고려해 줄기 대신 가지만 치기로 하고, 8 월 18 일 오전 10 시 30 분 경 유엔사 경비대장 보니파스(Arthur G. Bonifas) 대위와 바레트(Mark T. Barret) 중위, 그리고 한국군 대위 한 명이 경비원 7 명과 KSC 근로자 5 명을 데리고 현장에 들어갔다. 가지치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돼 북한군 경비장교 2 명 과 경비병 9 명이 트럭을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북한측은 무슨 공사를 하고 있느냐고 물어 가지치기 작업이라는 설명을 듣고 『좋다』면서 현장을 떠나지 않고 지켜봤다.
작업이 15 분 쯤 더 진행됐을까, 북한 경비병들이 한국 근로자들에게 『이 가지는 치고 저 가지는 안된다』는 식의 참견을 시작했고, 이윽고 북한장교 한 명이 유엔사 장교에게 작업 중지를 요구했다. 이 북한장교는 『나뭇가지를 더 자르면 큰 문제가 생긴다』고 시비를 걸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북한군 장교는 한국 근로자들에게 작업을 그만두라고 소리쳐 겁에 질린 근로자들이 작업을 중단했다.
화가 난 보니파스 대위가 근로자들에게 작업을 계속하라고 독려하는 동안 박철 중위로 나중에 밝혀진 이 북한군 장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으로 경비병 한 명을 보내 더 많은 경비병을 데리고 왔다. 북한군 경비병 수는 이제 30 명. 박철 중위는 시계를 풀어서 손수건에 정성스럽게 싸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갑자기 『죽여』라는 외마디와 함께 단번에 보니파스 대위를 때려눕혔다. 그러자 북한 경비병 5명이 일제히 합세, 보니파스 대위를 짓밟았다. 한국 근로자들이 버리고 달아난 도끼를 집어들어 도끼 뒷머리로 얼굴을 여러 차례 찍었다.
다음은 바레트 중위 차례. 바레트 중위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중에 유엔군 3 초소 동쪽 50 m 지점 도로 변 숲속에서 발견됐으나 역시 얼굴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맞아 보니파스 대위와 함께 서울로 후송하는 헬기 안에서 순직했다. 이 밖에 미 경비병 4 명과 한국 경비병 2 명도 부상을 당했다. 이들은 판문점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싸우다가 죽었다.
유엔군측이 무력하게 당한 것은 경비대장인 보니파스 대위가 제일 먼저 당하고 쓰러져 나머지 경비병들을 지휘할 사람이 없었고, 싸움이 순식간에 벌어져서 3, 4분만에 끝나 6 백m 밖에 대기중이던 기동타격대가 출동할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Newsbank
휴전협정 조인 이후 23년만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는 초유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사건이 벌어진 뒤 15 분 만에 북한측은 40 분 뒤인 그 날 정오에 사건 현장에서 쌍방 경비장교 회의를 하자고 전통문을 보내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경비장교 회의에 나갈 경비 책임장교 보니파스 대위를 살해하고서 경비장교 회의를 갖자니….
마침 전통문은 그의 시체가 판문점에서 후송돼 전방 지원부대에 도착했을 때에 맞춰 전달돼 더 큰 분노를 샀다. 더구나 이처럼 전례없이 큰 사건, 그것도 정전협정의 심장부인 판문점 회담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대위들 간의 경비장교 회의로 마무리지으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엔사가 이에 응할 리 만무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유엔군사령관 리차드 스틸웰 육군대장은 일본에 휴가를 가고 없었다. 그는 이 사건을 통보받자 얼마나 급했던지 여객기 대신 전투기 뒷자리에 타고 돌아왔다. 그의 사령관 사무실에서 지휘부서요원 회의가 소집됐다. 유엔사 부사령관, 참모장, 부참모장, 각 참모부장, 군정위 수석대표, 군정위 비서장이 회의 멤버였다.
당시는 한미연합사가 창설되기 전이어서 이 자리에 한국군은 한 명도 없었다. 스틸웰 장군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자기 책상 앞을 왔다갔다하면서 착석한 참모들에게 소리쳤다. 『우리 젊은 장교 두 사람이 놈들한테 살해됐다. 빌어먹을, 그놈의 나무를 잘라 버려야 겠어.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나한테 말들 해봐』 참모들은 사태의 심각성에 짓눌린 듯 선뜻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 시간만 흘러갔다. 스틸웰 사령관은 무엇인가 노트에 적고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서 상의할 것이며 데프콘 3 에 돌입해야 겠다는 말을 끝으로 지휘 부서요원 회의는 끝났다.
그후 각 참모들은 분주하게 돌아갔다. 사령관 사무실에서 나오는 길에 회의 중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참모 한두 사람이 『데프콘 3 은 전쟁일보 전까지 사태를 끌고 가는 것』이라며 걱정했다.
한국에서는 8·18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으로 부르지만 미국은 「나무자르기 사건 (Tree Cutting Incidents)」이라고 부른다. 나무를 자르다가 사건이 빚어졌고 나무를 자르면서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 베는 것을 엄호하기 위해 항공모함 과 핵폭탄 적재가 가능한 전폭기가 출격하는 무력 집중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물론 나무베기는 앞으로 유엔사 경비부대의 안전과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에서 유엔군의 권위를 회복, 유지하려는 의지의 상징이었다.
북한측은 이와 같은 유엔사 내부의 결정 과 실행에 대해서는 모른 채 계속 쌍방 경비장교 회의를 고집했다. 유엔사측은 사안의 심각성에 비춰 군사 정전위 전체회의를 소집하자고 했지만 북한측은 쌍방 경비장교 회의 참가 전에는 군정위 본회의에 응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8 월 18 일 밤 유엔사 수석대표는 조선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에게 보내는 유엔군 사령관의 메시지라며 군정위 본회의를 더이상 지연시킬 수 없음을 통보했다.
결국 양측은 19 일 오후 4 시 쌍방 경비장교 회의와 군사정전위 본회의를 동시에 개최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어제 공동 경비구역에서 조선 인민군 경비부대 인원들은 유엔사 경비부대 인원들에게 가혹한 적대행위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조선 인민군의 호전적이며 극악한 행위로 유엔사 경비장교 두 명의 죽음을 가져왔다. 이 사건은 군사 정전 위원회의 구성 자체를 위태롭게 했을 뿐 아니라 쌍방이 1953 년 7 월에 합의한 공동 경비구역의 중립성을 위배하고 정전협정에 관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관례 와 규약을 위반하는 행위다. 휴전에 정식으로 서명한 이래 과거 23 년동안 전혀 없었던 공 동경비구역 경비 인원들의 공공연한 무자비한 살인사건은 계획되지 않은 우발적 언쟁으로 빚어진 사건은 아니다.(…) 본인은 당신이 앞으로는 이런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담보를 할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이것은 유엔군 사령관이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며 군정위 수석대표가 대독한 내용. 이와 함께 사건 당시 촬영한 사진들을 증거로 제시했다. 다음은 북한측의 이 사건에 대한 인식과 설명.
『유엔사 작업인원 몇 명이 경비병 10 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도로 옆에 서 있는 그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우리 경비병 4 명이 그 곳에 가서 그 나무는 우리가 심고 기른 것으로 도로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라며 약 30 분 동안 자르지 말라고 설득했었다. 그리고 반드시 잘라야 한다면 북한측 과 상의해서 합의를 본 다음에 해야지 일방적으로 자르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유엔사측 경비원들은 인민군의 요구를 무시하고 인민군 경비병들에게 도발적인 행위를 시작했다. 그래서 인민군 경비병 5 명이 부상을 입어 자위적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사건은 유엔측이 계획적으로 자행한 도발행위이며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에서 긴장을 조성시키는 목적으로 꾸며진 것이다. 그 증거로는 지난 8 월 6 일에도 바로 이 나무를 자르려는 것을 못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더 많은 인원들을 투입해서 나무를 자르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제 5 감시초소에서 전방 지원부대 부책임자, 유엔사 당직장교, 그리고 다른 장교들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유엔사 측이 제시한 사진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유엔측이 사전에 계획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는 인민군측이 현장에서 경비장교 회의를 하자는데도 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사측은 「야만한 살인사건」이니 「잔인한 행위」이니 하면서 우리를 욕하면서 자기들의 범행을 가리려 하고 있다』
북한측 수석대표는 한술 더 떠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건 가담 주모자들을 엄히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기가 막힌 적반하장이었다. 유엔사 수석대표는 유엔군 사령관의 항의문을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게 전달할 것을 다시 한번 요구하고는 휴회를 제의했다. 북한측이 할 말이 더 많은 듯했다.
이 밖에도 비무장 지대나 공중, 해상에서 유엔사와 국군이 정전협정을 위반했다는 사항을 읽어 내려간 뒤 발언을 끝냈다. 하지만 북한측 역시 정치선전을 자제, 발언이 이례적으로 짧은 편이었다.
아마도 북한은 이 제 379 차 본회의에서 다룬 것으로 8·18 사건이 마무리될 줄 착각했던 것 같다. 유엔사는 그와 같은 착각을 원했다. 북한이 「나무자르기 작전」에 대해 미리 아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UN군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던 주한미군 사령관 리차드 스틸웰은 스틸웰 사령관은 그 날 워싱턴에서 열리고 있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NSC) 에 그의 결심을 보고해 재가를 얻어냈다.
'데프콘3(Defense Readiness Condition 3 : 예비경계태세)'를 발동하고, 미군방송을 통한 임시발표에서 휴가중이거나 부대를 떠나 있는 전장병에게 즉시 복귀하도록 명령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데프콘 3'가 발령되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미루나무 절단 작전 때에는 데프콘 2(공격준비태세)까지 올라갔다.
이에 맞서 북한도 김일성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의로 인민군과 예비군격인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에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에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전국에 '북풍 1호(준전시상태)'를 선포하여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 치달았다. 미국의 포드 행정부는 긴급참모회의를 열고, '워싱턴특별대책반'을 구성하여 스틸웰의 제안에 따라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작전은 미국의 전설적인 나무꾼의 이름을 따 '폴 버니언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명명되었고, 1976년 8월 21일 아침 7시에 강력한 무력시위를 동반하여 전격 단행되었다. 미국 본토에서는 핵탑재가 가능한 F111전투기 20대가 날아왔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는 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하였다. 무력시위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교전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전쟁계획인 일명 '우발계획'까지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절단 작업시 교전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군 포병과 미군포병이 북한지역 개성의 인민군 막사에 대한 포격과, 개성 위쪽의 시변까지 포격하여 초토화하고, 인민군 포병부대를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남진할 경우 이에 대한 전술핵의 사용도 고려되었다. 그야말로 핵전쟁까지 상정한 실질적인 전쟁계획이었던 것이다.
미루나무 절단 작전에는 태권도 유단자로 구성된 한국군 64명의 특전사 장병들이 투입되었고, 1사단 수색대도 참여하였다. 당시 특전사 장병들은 카투사병으로 위장하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 입구에서 경계근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우발계획'의 내용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이들의 실제 임무는 북한군을 자극하여 도발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도발유도계획은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준비한 계획이었다. 이들은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무기 휴대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M16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으로 무장하고 북한군을 살해하기 위해 '특전사 자체계획'하에 움직였다. 나무가 절단되기까지 북한군의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자 이들은 공동경비구역 안의 북한군 제5·6·7·8초소를 파괴하고 무력을 과시하며 북한군의 사격을 유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에는 "도발하지도 말고 도발에 걸려들지도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작전 종결후 북한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전달했다. 북한의 유감표명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 미국은 북한의 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가 24시간만에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하였다. 아마도 여기에는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던 사정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후 북한군과 UN군사령부는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 제446차 비서장회의에서 판문점 '공동경비'를 군사분계선에 따라 '분할경비'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었던 북한군 4개초소가 철거되었고, 북한군이 통로로 사용하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지금까지 통행이 차단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유일하게 남북한이 공존하던 판문점에는 그후 회의장 건물 구역에 너비 50cm, 높이 5cm의 시멘트포장 경계선이 만들어졌고, 그밖의 부분은 가로 세로 10cm, 높이 1m의 시멘트 기둥이 10m 간격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휴전선이 다시 그어지게 된 것이다. 만약에 미국의 우발계획과 남한군의 도발유도계획에 따라 당시에 단 1발의 총성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상황은 단순교전상황을 넘어 핵전쟁까지 치달았을 것이고, 한반도는 지금 핵폭발에 의한 방사능 오염으로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지옥으로 변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한반도가 남북한 절멸의 위기에 놓였던 무서운 순간이었다. 다른 한편으론 정전협정체제가 전쟁위기방지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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