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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14연대 반란사건여수 14연대 반란사건

Posted at 2012. 5. 29. 01:52 | Posted in ▶ 글쓰는 블로그/내멋대로 끄적끄적

 

 

여순사건,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이라고도 부른다. 제주4·3사건과 함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적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흔히 여순반란사건이라고 하였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다고 하여 1995년부터는 '여수·순천사건' 또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사용한다.

 





 

<< 여순사건의 배경 >>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제1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친일관료와 우익 청년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협소한 지지기반과 이후 각료선임과정에서 한민당과의 갈등, 좌익세력의 격력한 저항, 심화되는 민생문제 등으로 출범 직후부터 휘청거리고 있었다. 한편 공산주의자 들은 2ㆍ7구국투쟁, 제주 4ㆍ3민중항쟁, 5ㆍ10단독선거 반대투쟁 등의 좌절을 겪으면서 새로운 투쟁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당시의 일반적인 정세 속에서 여수ㆍ순천ㆍ여천ㆍ승주ㆍ보성ㆍ구례ㆍ광양ㆍ곡성ㆍ고흥 등 전남 동부지역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가 온건하였고, 1948년 초까지도 도내 다른 지방에 비해 좌우익이 어느정도 공존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5ㆍ10단독선거 저지투쟁'과정에서 나타난 군중들의 투쟁의 파고가 그 밖의 다른 지역보다 그다지 높지 않았던 까닭에 해방 이후 인민위원회와 그와 연관된 조직이 파괴되지 않고 계속 온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5ㆍ10선거 직전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다른 지방에 비해 매우 조직적으고 광범위한 참여 양상을 보였다. 이 당시 여수 중학생들의 동맹휴학은 여순사건 폭발 시 봉기군인들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을 맺은 집단이 학생이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즉 1948년 전반기의 정치투쟁과정에서 여순 지역은 전남도내 다른 지방에 비해 온건좌익과 동조세력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남로당의 입김은 미약했다. 하지만 이 지역은 5ㆍ10선거 후 남로당이 7월 15일부터 실시한 '지하선거'와 9월 이후부터 본격화된 '인공기 게양투쟁'과 '미소 양군 철수 요구투쟁'을 통해 상대적으로 급진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1948년 5월 초, 확군작업의 일환으로 광주의 국방경비대 제4연대 1대대를 근간으로 한 여수 제14연대가 창설되었다. 이 부대의 창설은 여순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다. 그 이유는 첫째, 기간요원 가운데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지창수 상사(인사계)를 비롯하여 김지회 중위(대전차포 중대장), 홍순석 중위(순천 주둔 중대장) 등 좌익계 간부들이 연대 내에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사병의 모병작업이 전남 일원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신원조회 없이 실시됐던 까닭에 경찰의 수배를 받느느 좌익계열이 다수 입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14연대는 전남 지방 좌익들의 은둔처로 변했고 좌익의 선동에 쉽게 동조할 수 있는 계층 출신의 사병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요컨대 당시의 상황은 이승만 정권이 불안정하게 출범한 가운데 좌익세력이 단선단정 반대투쟁의 좌절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순 지역 좌익들의 조직보존과 학생들의 상대적인 급진화, 그리고 결정적으로 14연대의 여수 주둔 등은 여순사건을 발발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사건의 발발과 확산 >>

1948년 제주 4ㆍ3 민중항쟁 발발 이후 10월에 들어서면서 제주도의 유격대는 재차 공세를 강화하면서 각처에서 토벌대를 위협했으며, 이에 대해 이승만 정군은 계속적인 병력투입으로 그 위협을 극복하려 했다. 이런 와중에서 갑자기 10월 15일경, 국방경비대 사령부로부터 제14연대에 10월 19일 오후 8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갑작스런 제주도 출동명령은 제 14연대내 좌익계 사병들에게 동족상잔과 반란 중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다.


10월 19일 밤, 제주도로 출발하는 해군 상륙정에 몸을 실어야 하는 순간, 이 연대의 좌익 세포 책임자 지창수 상사 등 핵심 세포 40여 명은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었다. 1대대 사병전원이 연병장에 집결한 가운데 지창수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 반대, 경찰타도'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 민중의 군대로 행동할 것'을 호소하였고, 대다수 사병들이 이에 적극 동조하였다. 이리하여 출동부대는 반란군으로 돌변하였고, 여기에 나머지 2개 대대도 합류하여 반란군은 2천5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곧이어 인민군 편성을 마치고 그 날 밤 11시 30분경 여수 읍내로 진격하였다.

20일 새벽 1시 20분경 여수 읍내로 진입한 반란군은 읍내 좌익단체와 학생단체원 6백여 명에게 무기를 지급하였고, 이들 반란군과 좌익청년들은 오전 3시경 여수경찰서를 접수하고 5시경 여수 읍내 각 관공서와 중요기관을 점거하여 날이 밝아오기 전에 이미 여수읍은 그들 치하에 들어갔다. 이어 10시경부터 보안서와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좌익청년들의 주도 아래 피신한 경찰, 우익 주요인사와 청년단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여수를 점령한 반란군 가운데 2천여 명이 당일 오전 열차와 차량을 이용하여 순천으로 향했다. 한편 20일 새벽의 상황을 무선으로 접한 순천경찰은 인접 군 경찰병력의 지원을 받아 반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 지역은 여순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홍순석 중위를 중심으로 하는 제14연대 2개 중대와 20일 새벽 광주에서 파견된 제4연대 1개 중대 병력이 방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 9시 30분경 반란군 선발부대 7백여 명이 기차로 도착하자,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 2개 중대가 반란군에 전격합류하여 함께 순천읍을 공격하였다. 이내 제4연대 1개 중대도 사병들이 폭동을 일으켜 반란군에 합류하여 12시경 순천읍을 포위하였다. 한편 순천읍을 방어하던 군이 반란군에 합류한 가운데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피신하는 데 급급하였고, 오후 3시경 순천은 반란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다. 순천이 점령되자 좌익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무기가 지급되었고 그들은 경찰과 우익들을 색출하는 데 앞장 섰다.




<< 여순사건의 진압 >>

여순사건에 접한 이승만 정권은 10월 21일 반군토벌 총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고 총 10개 대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포위하고 여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진압작전의 1단계는 순천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진압군은 23일 아침 7시 81밀리 박격포 사격과 L-4정찰기의 공중지원을 받으며 장갑차 부대를 선두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진압군의 총공격으로 김지회등 반란군의 주력은 광양 방면과 인근 산악 지대로 후퇴했으며, 읍내는 경무장한 좌익청년과 학생들이 치열한 시가전으로 맞서고 있었다. 결국 처참한 살육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오전 11시경 순천은 진압군에게 점령되었다.


제2단계 진압작전은 광양 방면의 봉기군 주력을 섬멸하는 것과 여수를 탈환하는 것이었는데, 여수 진압작전은 24일 여수만을 포위한 상태에서 개시되었다. 이 때 여수의 초입인 미평 근처에서 매복중이던 봉기군의 기습으로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반군토벌 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철모에 총탄을 맞고 장갑차에서 떨어졌다. 그는 고막이 터지고 허리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이 매복 기습으로 3연대 병력 270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틈에 반란군의 주력 일부는 벌교와 지리산 방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가운데 여수 시내는 14연대 반란군 2백여 명과 약 천 명의 청년학생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25일 진압부대가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가지에 박격포 사격을 퍼부으며 연 이틀 공격을 계속하였고, 이에 대항한 저항세력은 시가전의 와중에서 다수의 희생자를 낳았다. 진압군은 27일 오후에야 여수를 완전 점령할 수 있었다. 진압된 여수 시내에는 희생된 반란군과 청년 학생의 시체가 즐비했고, 무자비한 박격포 사격으로 대형 화재들이 발생하여 시내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진압군의 여수 점령을 마지막으로 여순 봉기는 일단 매듭 지어졌고, 경찰과 공공기관이 업무를 재개하였다.


한편 여순 지역을 평정한 정부는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내린 후 가정 먼저 봉기군과 동조자를 철저하게 색출, 처벌하는 작업에 나섰다. 진압군의 가혹한 처벌정책은 동족에 대한 아량이나 연민의 정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즉 누가 부역자인지 판단의 객관적 근거가 부재한 상태에서 경찰, 우익인사, 청년단원 등 봉기군 치하에서 가장 피해를 본 세력들에 의해 민간인 참여자의 색출작업이 진행되었고, 그것은 보복 테러와 무차별적인 학살로 귀결되었다. 무고한 청년들이 단지 학생복을 입은 죄, 흰 운동화를 신은 죄, 국방색 런닝 셔츠를 입은죄, 머리를 짧게 깎은 죄, 과거에 좌익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다는 죄, 가족과 친구 가운데 좌익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는 죄 아닌 죄로 젊음을 마감해야 했다.

11월 말, 봉기로 인한 사상자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진압군측 군인 141명이 사망하고 263명이 실종되었으며, 391명이 봉기군에 합류했다. 한편 봉기군측에서는 821명이 사망하고 2,860명이 사로잡혔다. 민간인 사상자에 대한 총계는 찾아볼 수 없지만, 순천에서만 5백여 명이 사망한 것을 볼 때 여수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수가 사망했을 것이다. 또한 1,714명의 봉기 참여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여기에서 866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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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얼짱각도
    6월이면 앓는 '희귀성 열병'











    해마다 6월 25일이 가까워지면 나는 우울하다. 남´북으로 갈라진 동포민족이 맞붙어 싸워서,

    수백만의 인간이 죽고, 다치고, 귀하고 아까운 재물이 한반도의 방방곡곡에서 잿더미가 된 전쟁기념일을 맞으면서 기뻐할 사람이 하기야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같은 심정일 것이다.







    잔인한 '전쟁의 악몽'



    지금을 살고 있는 60대 이상은 거의 예외없이 그 동족상잔의 전쟁터에서 용케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다. 전쟁을 총 들고 몸으로 치르지 않았다면, 적어도 전쟁의 언저리에서 죽음에 버금가게 처절히 생존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휴전협정 초안에 전쟁 당사자 군대의 대표가 도장을 찍기까지의 3년남짓 기간의 생존은 악몽이다. 그 시기에 철이 들어서, 죽음과 굶주림, 헐벗음과 공포와 절망……, 그 모든 것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나이의 많고 적음의 차이를 넘은 공통의 회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악몽'이다. 나는 40년이라는 긴 세월,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잠 속에서 그 전쟁의 악몽에 시달리곤 한다.

    다시는 되돌아가보고 싶지 앟은 그때, 그 장면, 그 경험이 되살아난다. 이런 체험을 하지 않은 그 후의 세대들은 행복하다.

    전쟁! 그것은 잔인한 것이다. 인간이 평소에 그 몸과 마음속에 갖는 따뜻한 것을 깡그리 얼어붙게 한다. 전쟁 속에서는 '잔인'이 인간의 생명인 성싶어진다.





    6·25를 회상시키는 희귀성 열병



    전쟁이 끝난 지 올해로 꼭40년이 지났다. 전쟁과 마신(魔神)이 목숨이 있는 것과 목숨이 없는 모든 것을 깨 뭉개고 지나간 후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나는 지난 40년 동안 그러했듯이 올해도 '6·25'를 회상시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또 우울해진다. 이 나라의 60대 이상 세대에게는 평소에는 멀리떠나가 있다가도 이맘때만 되면 어김없이 돌아와서 그들을 괴롭히는 일존의 '회귀성(回歸性)열병'인가 보다. 죽는 날까지 괴로워해야 할 열병! 이맘때가 되면 나는 그 당싱의 진실과 진상을 아무것도 모르는 신문이니 라디오니 텔레비젼이니 하는 것들이 떠드는 '6·25'가 어쩌고 전쟁이 어쩌고 하는 소리들이 역겨워 진다. 잠시 동안, 이런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 어떤 먼 곳에 가서 지내다가 돌아오고 싶어진다. 그러면서도 거의 해마다 서울의 거리에서 그 역겨운 소리를 듣고 보고 하면서 지내왔다.

    그런 것들 가운데서도 제일 구역질나는 것이 정부와 광적인 반공주의 집단이 서울 시청 앞 지하쳘역 갈아타기 복도 벽에 빼곡히 내다 붙이는 이른바 '6·25전쟁 사진전'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민군의 양민학살'이니 '공산당의 비인간성'이니 하는, 대문짝같이 큰 글자를 머리에 이고 나오는, 흰 바지저고리 입은 수많은 떼죽음의 시체들이다. 소름이 끼친다.

    전쟁이 끝난 뒤 오늘까지 40년간, 그들은 이따위 사진전을 가지고, 또는 같은 장면의 사진을 신문과 텔레비젼으로 되풀이 보여주는 방범으로 대중의 '반공의식'이라는 추악한 감정을 선동해왔다.

    6·25전쟁의 진실과 진상을 모르는 후세대들에 대한 '반공교육'이 라는 것이다.
  2. 얼짱
    나를 우울하게만드는 사진전



    각종 학교와 공공사회의 온갖 곳에 이따위 사진을 내걸어놓고 그 개인과 집단들이 노리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북한 인민군, '북한 공산주의자'는 악마였(이)고, '남한의 정권·국군·경찰·청년단……,통틀어 자기들은 천사와 같이 어리고 아름다운, 그리고 눈물이 가득 찬 인도주의 정신의 소유자였(이)다……라는 자기선전이다. 자기들은 그런 잔인무도한 양민학살을 명령한 일이 "한번도 없다"는 주장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군대는 6·25전쟁 동안 무고한 양민을 대량학살한 일이 "절대로 없다"고 한다. 남한의 경찰은 그 전쟁기간에 무력한 대중·시민의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들이 보여주는 힘없고 무고한 사람들의 떼죽음은 모두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인민군'이 저지른 '잔인무도'한 '양민대량학살'이라는 것이다. 서울 시청 지하도 보도의 높고 넓은 벽에 꽉 차게 확대한 그 사진들의 성명문은 으레 '천인공노할'이거나 '인간의 탈을 쓴'이라는 따위의 수식어가, 설명문의 다른 글자들은 검은색인데 유독 그 수식어들은 피가 뚝뚝 흐르는것 같은 뻘건 색으로 쓰여져 있다.

    논바닥에 파인 큰 구덩이에 내던져진 농민들의 시체, 언덕 비탈에 더미를 이루고 있는 유혈이 낭자한 주검들, 몸뚱이와 머리가 아무렇게나 떨어져나간 끔찍한 물체들. 그리고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그런 장면을 멀리서 둘러싸고 울부짖고만 있는 각족 같은 사람들, 주검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발버둥치고 있는 아낙네들, 아버지들, 아들들, 딸들……!

    전쟁은 인간을 동물의 상태로 환원시킨다. 그 속에서 인간은 수억 년 전의 자신의 원형으로 돌아간다. 동물적 본능만이 그 속에서 인간행동의 동기이자 목적이 된다. 전쟁터에서는, 총알과 포탄이 날고 터지는 속에서는, 인간은 이미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차라리 그렇기를 거부한다.

    6·25라는 40년 전의 전쟁 속에서,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이 그랬고 그들을 맞은 국군이 그러했다. 38도선을 뭉개버리고 이북으로 진격해 올라간 이남의 군대가 북쪽 땅에서 그러했고, 그들을 맞아싸운 이북의 인민군이 그러했다. 쌍방의 지휘관이 그랬고, 경찰·쳥년단이 다 그러했다. 전쟁에서 일어난 '잔인무도'에는 어는 한쪽만의 책임과 죄로 돌리는 것으로 해소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것이 나의 전쟁관이라면 전쟁관이다. 그러기에 나는 전쟁에 관한 한 어느 쪽의 당사자건, 전쟁 상대방에 대한 그들의 선전은 믿지 않는다.

    6·25의 날이 가까워지면서 서울 시청 지하철역의 1호선과 2호선을 갈아타기 위한 광장복도를 걸으면서 해마다 내가 우울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3. 얼짱
    22세 청년이 겪은 동물적 충격



    나는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 경상북도 안동(安東)읍의 안동공립중고등학교(당시의 학교제도) 영어교사로 있었다. 서울 주변에서만 울리는 것으로 알고 있던 대포 소리가 며칠 뒤에는 안동중학교 교실에까지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민군의 원주와 치악산 재를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피난길에 나선 나는 경상북도 도학무국에 들러, 한 달분의 월급을 탔다. 그 돈을 피난행을 계속해야 할 부모님께 드리고 곧바로 육군에 자진입대했다. 1950년 7월 16일이다.

    그날부터 나는 3년 6개월을 최전방 전투지에서 지냈고, 휴전협정이 조인된 직후에 후방사령부로 전속되어, 역시 3년 6개월을 후방지역의 여러 부대를 전전했다. 1957년 6월 17일 예편했으니 어김없는 만 7년의 군복무를 한 셈이다.

    그 예편 날에 받은 예편통지서에는 이제는 다 색이 바랜 펜글씨로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성명 : 李泳禧

    생년월일 : 1929년 12월 2일

    계급 : 육군소령, 군번 : 223848

    병과 : 보병

    소속 : 육군인쇄공창



    이 최전방 전투지역 근무의 3년 6개월에는 1950년 9월부터 1951년 여름까지의 지리산 지역 전투가 포함된다.

    우리나라 6·25 전사(戰史)에 '지리산 공비소탕작전'이라고 기록되는 전투다. 보병 제11사단 제9연대 연대본부에 속했던 나는 일선 중대의 '공비토벌' 전투가 끝날 때마다 수없이 많은 시체와 부상자를 목격했다. 사실, 지리산 토벌전투 1년간에 본 인간에 의한 인간생명의 파괴 앞에서 나는 인간을

    증오하게 되었다. 군대라는 것을 부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대라는 무력집단의 힘으로 이루고자 하는 모든 목적과 행동을 미워하게 되었다. 6·25전쟁의 어느쪽에서건 상대방을 매도하고 자기를 미화하는 모든 언사를 믿지않게 되었다. 인간이 바로 악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이 겨우 스물두 살의 이상주의적 청년이 겪은 동물적 공포와 충격은 40년이 지난 뒤에도 정신적 내면에 상흔(像痕)으로 남은 채 지워지질 않는다.





    11사단 9연대의 거창 양민학살



    그 첫 계기는 이 나라의 해방후사에 악명 높은 소위 '거창 양민대량학살사건'이다.

    내가 근무한 보병 11사단 9연대가 바로 6·25전쟁 초기에 '남한 군대의 잔학성'을 유엔과 전 세계에 떨치게 한 거창 양민대량학살을 저지른 그 부대다.

    1951년 2월 10일과 11일 사이의 밤중에 우리 연대의 제3대대는 거창군 신원면(神院面)에서 719명의 농촌양민을 집단학살했다. 1950년9월. 유엔군이 인천 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의 일부가 지리산에 집결해 있었다. 인민군 정규군의 패잔 병력과 민간인 유격대가 합세한 '지리산 빨치산'의 병력은 그 시기 약6,000명으로 추산됐다. 전라북도 남원에 사단본부가 제13연대와 본부를 두고 제9연대가 경상남도 진주에 본부를 설치하여, 2개연대가 동·서·남·북에서 지리산을 포위하고 빨치산을 섬멸한다는 작전이었다. 사단장은 해방 전 중국에서 광복군 장교였던 최덕신 소장이었다(최 소장은 그 후 휴전회담의 한국 정부대표, 천도교 두령을 지내다가 80년대 후반에 북한으로 가서 높은 지위를 누리다가 몇 해 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남한에서는 '공비'(공산주의 비적)라고 불린 빨치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우리 11연대는 그 몇 배의 피해자를 냈다. 처절한 아비규환의 현장이 매일 전개되었다.

    이때에 키가 작달만한 한동석(韓東錫) 소령이 대대장인 제3대대가 거창군 신원면에서 719명의 농촌양민을 집단학살해버린 것이다.

    지리산에 준동하는 공비들과, 낮에는 국군에 협력하지만 밤에는 공비로 표변하거나 그들을 돕는 '악질분자'와 '빨갱이' 들을 일소했다는 것이다.

    나와는 개인적으로 격의 없이 지내던 연대장 오익경(吳益慶)대령은 이 대량학살된 양민의 수를 187명으로 축소하여, 그것을 '공비사살 187명'으로 보고했다. 공비사살 187명, 그것은 굉장한 '전과'다.

    한동석 소령의 제3대대는, 형식상은 부대의 정보장교들과 거창군 경찰서 형사들로 하여금 신원면 일대의 주민을 '시국강연' 명목으로 신원국민학교 교정에 집결시켰다. 그들은 부락민들 속에서 군인·경찰·공무원, 돈 있는 인사들의 가족들만 골라낸 다음, 작전명령 제5호에 따라서 군법회의 간이재판을 열어, 신원면 '인민위원장'을 비롯한 '빨갱이' 187명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그들을 마을의 박산(朴山)으로 끌고 가 총살형을 집행했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굉장한 전과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 굉장한 공비소탕작전 '전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나간 장병들에게는 엄격한 비밀유지 명령이 내려졌고, 연대와 사단의 사령부에서도 다른 장병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낌새도 채지 못했다.





    세계가 경악한 양민학살사건



    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대량학살사건이 끝까지 비밀에 묻혀버릴 수 없는 일이다.

    3월 29일, 즉 사건 한 달 뒤에, 거창군 출신 신중목(愼重穆)이 군과 경찰의 온갖 협박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사실을 국회에서 발설했다. 이때 국회는 물론 피난 수도 부산에 있었다.

    이 국회보고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정부와 국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국군이 '악질분자''빨갱이'를 죽였다는데 대한민국 내의 어느 누가 감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빨갱이'라는 이름만 붙이면 그 인간은 그순간에 인간이 아닌 것이 되었다.

    '반공주의'를 내세운 권세 있는 사람이면 그 당시, 그 싫어하거나 미워할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만 붙이면 그것으로 그 인간을 '무존재'(無存在)로 만들어버릴 수가 있는 광신적 반공주의시대였다. 더구나 '작전명령'에 따르는 '군사재판'을 해서 총살했다고 우기는 데야 이 나라 하늘 아래 누가 감히 말썽을 부리겠는가? 사건은 그것으로 영원히 잊혀지는 성싶었다.

    하지만 일은 군대와 정부가 바라는 대로 돼가질 않았다. 한국전쟁 취재를 위해 와 있던 외국신문·통신특파원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거창 양민대량학살 뉴스는 전파를 타고 삽시간에 전 세계에 알려졌다. 세계는 경악했다. 마침 한국전쟁 문제를 다루고 있던 유엔이 발칵 뒤집혔고, 영국 의회에서는 한국전쟁에 파견한 영국 군대를 철수시키는 야당의 긴급안이 제출되기에 이르렀다. "남한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 전 세계에 유행하게 된 바로 그 사태다.



  4. 얼짱
    혼비백산한 국회 진상파악 조사단



    전 세계와 유엔의 분노를 산 이승만 대통령은 마지못해 국회로 하여금 진상파악을 위해서 국회현장조사단을 파견키로 의결케 했다. 신사복을 입은 국회의원들이 지프차를 타고 부산을 떠나 거창을 향해 험준한 시골 자갈길을 먼지를 내면서 달리고 있었다. 거창에는 아직도 몇 시간이 남았다는 어느 산골짜기 모퉁이를 도는 순간, 주변 사방의 언덕 숲 속에서 그들을 향해 기관총탄이 날아들었다.그들의 차 행렬의 앞뒤를 경호하던 11사단 호위 병력의 지휘 장교가 긴급 정차하면서 국회의원들에게 보고했다.

    "인민군과 공비 대부대의 기습 매복공격입니다. 큰일났습니다. 여기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위험하니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혼비백산한 국회의원들은 정신없이 왔던 길을 전속력으로 달려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머리에는 '국군'에 대한 감사와 '공비'에 대한 증오심이 새삼스럽게 가득 찼다. "군대가 말하는 대로다. 공비와 그 동조자는 싸그리 도살해버러야 한다." 조사위원들의 그 같은 마음에서 국회보고로 모든 일은 없었던 것이 되는듯했다. 대한민국 만만세!다.





    자유당 정권의 위장전술



    그러나 세상사는 그렇게 악당들이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가 국회현장조사단의 거창시찰을 못하게끔,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에게 방법을 강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씨름군이었다가 일본군에 자진 입대한 지원병 하사로, 해방 후 대한민국의 권력자의 한 사람으로 출세한 김종원은 우리 9연대의 1개소대 병력에게 '공비'옷을 입혀 공비로 가장시키고는 국회조사단을 매복 요격케 했던 것이다. 물론 쏘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혼비백산하게 하는 것으로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이었다. 국회의 조사는 막았지만 세계 여론의 악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내무·국방부의 3부 장관을 사임시키고, 김종원은 파면·전 급료 몰수·징역 3년형에 처해졌다. 나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플레이보이 연대장 오익경 대령, 사건의 책임 대대장 한동석 소령이 구속되었다. 3소대 정보주임 이종배소위도 직접 학살 지휘자로서 군법에 부쳐졌다.

    거창사건으로 세계에 그 악명을 떨친 대한민국 육군 보병 제11사단은 그 후 장도영 장군의 제6사단과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 임무를 교대했다. 최전선이 금강산 남쪽에서 줄다리기를 하듯이 오르고 내리고 하고 있던 강원도 산악전선을 향해서 나의 부대가 북상 이동하고 있던 동해안의 양양 부근을 지날 무렵, 군법재판이 오익경 전 연대장에게 무기징역, 한동석 전 3대대장에게 징역10년을, 이종배 소위에게 무죄를 언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단장 최덕신 소장은 이미 사건 뒤에 해임되어 있었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있었다. 양민대량학살의 책임자들은 형무소에서 귀족같은 대우를 받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형을 채우기는 커녕, 1년도 안 가서 모두 석방되었다. 금강산 비로봉이 멀리 동북 방향으로 바라보이는 동해안 전선, 눈에 덮인 깊은 건봉산(乾鳳山) 꼭대기의 Op에 서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대한민국의 군대와 대한민국에 절망을 느꼈다. "내가 왜 이렇게 최전방을 찾아다니면서 고생을 해야 하나, 차라리 나도 남들처럼 '백'을 찾아서 편안한 후방근무로 빠져나갈까……." 결국 나는 '백'없는 장교로 휴전조인의 날까지 최전선에 머물러야 했다.





    피살자76퍼센트가 노약자



    그런데 나를 더욱 놀라게 하고 더욱 분노케 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날 거창의 흙구덩이에 쓸어 넣어진 학살된 양민의 수가 정부가 발표했던 187명이 아니라 719명임이 밝혀진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도 8년이 지난 1961년, 이승만 대통령 정권이 4·19학생혁명으로 축출된 뒤에 거창학살사건의 유가족들이 국회에 제출한 진정서에서 그 상세한 내용이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졌다.

    유가족들은 오랫동안 스스로 유족이라는 사실조차 말하지 못한 채 암흑의 세상을 살아왔다.

    그들은 민주당(장면 총리) 정부와 국회에, 국군에 의해서 억울하게 학살된 혈육의 원한을 씻어줄 것과 명예회복 그리고 보상조치를 요구했다.

    그 진정서를 보면, 정부가 그 당시 '공비 협력자'라고 주장했던 피살자들의 신상을 알 수 있다.

    부락별로는 대현리 285명, 중유리 182명, 와룡리 151명, 덕산리 76명, 과정리 4명, 산청 등 기타 21명.

    연령별로 보면, 60세 이상 노인이 66명, 80세 이상이 6명이다.

    최고 연령자인 92세의 노인도 '공비'가 되었다. 뛰거나 걷기는 커녕 병들어 누워서 시체나 다름없는 92세의 노인도 '공비'로서 학살당해야 했다. 생각해 보라!

    3세 이하의 젖먹이가 100명 가까워 전체의 약 14퍼센트, 4~10세의 유아가 191명, 11~14세 소년이 68명이다. 14세 이하가 모두 전체의 절반인 359명이나 된다. 이런 소년들과 60~92세의 노인들을 '빨갱이' '공비협력자' '악질분자'로 대량학살한 군대는 어느 나라 군대인가? 어떤 군인이기에

    그런 짓이 가능했던가?

  5. 얼짱
    민주당 정권 국회 속기록



    6·25의 날이 가까워지면서 내가 서울 시청 앞 지하철 갈아타기 광장을 지나면서 우울해지는 까닭은 부대가 직접 관련된 거창 양민대량학살 사진이 '인민군의 잔인무도한 양민학살현장' 사진으로 둔갑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4·19학생혁명으로 6·25전쟁의 은폐됐던 사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잡아달라는 진정서가 남한

    방방곡곡에서 민주당 정부 국회에 제출됐다.

    이승만과 군인이 지배했던 자유당 정부가 사라지고, 90퍼센트 이상의 공정한 선거 득표로 선출된 민주당 국회는 진상조사를 실시했다. 국회조사단에 의해서 확인된 사건들 중 몇 개만을 의사록에서 옳겨보자.



    ● 국민방위군 대량 아사사건: 6·25 직후 강제로 후방으로 끌고내려간 장정 50만 명에 대한

    식량예산을 군 고위장성들이 가로채어 무수한 장정을 굶어죽게 하고, 귀가한 장정 가운데 80퍼센트가 노동 불능, 20퍼센트가 재기 불능의 불구자가 되게 한 사건.



    ● 산천·함양 양민학살사건: 경상남도 산천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에서 1951년 2월 5일과 7일약 800명의 양민을 역시 '시국강연'에 소집하여 산 위에 배치해 기관총으로 집단 사살한 사건.



    ● 문경 양민학살사건: 1951년 2월,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에서 150명의 주민을 역시

    '반공강연장'에 모아놓고 집단 학살한 사건.



    ● 시천면(矢川面) 양민학살사건: 경남 산천군 시천면에서 버스11대에 실은 주민(그 정확한 수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을 문경학살과 같은 날에 집단 학살한 사건.



    ● 함평 양민학살사건 : 전남 함평군 월야면·해교면·나산면 등지에서 9·28수복 직후인 1950년 음력 10월 29일부터 12월 10일까지 사이에 약 1,000명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



    ● 전북 남원군 주천면 학살사건: 허현리와 덕치리에서 1950년 음력 10월 10일 새벽, 4개 부락을 포위한 국군이 700명의 주민 가운데, 청년60명을 덕치산 가갯골로 끌고 가서 기관총으로 학살한

    사건.



    ● 부산 수장(水葬)사건: 임시 수도 부산의 동광동에 있던 군특무대에서 매일 통행금지시간에 밤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트럭으로 양민을 실어다가, 손을 줄줄이 철사로 묶어 부산 앞바다에 싣고 가 바다에 집어넣은 사건. 그 수는 약 만 명이 넘을 것이라는 기록이다.



    ● 보도연맹(保導聯盟) 대학살사건: 광복 후 남로당원이었거나 남로당원이 아닌데도 체제비판적·양심적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로 행정구분되었다. 그들은 강제로 '보도연맹'이라는 감찰조직에 가입되었다. 6·25 후퇴시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집결· 학살되었다. 그 수는 다만 추산될 뿐이다. 하느님만이 안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10만이 넘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 제주도 4·3학살사건: 1948년 4월 3일 국군·경찰·서북(반공)청년단들이 제주도를 점령하다시피 하여 행세하는 도중에 이에 항의하는 제주도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하기 시작한 사건. 생명을 잃은 제주도민의 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약 3~4만으로 추산된다.





    이밖에도 유사한 사건은 수없이 많다.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사건들의 진상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왜? 군인이 통치하는 대한민국에서 국군과 경찰과 '우익'반공청년단이 학살한 양민의 수가 어떻게 밝혀질 수 있었을 것인가? 4·19 이후에 진상조사를 당국에 진정했던 거창군민 유족들은 거꾸로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서 처벌당했다. 그것도 법정에서 법률의 이름으로.

    이게 어떻게 된 법인가? 대한민국의 법이란 무엇인가?

    위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양민대량학살사건을 살짝 들여다 보았다. 그 현장사진들은 그 후

    확대 복사되어 '6·25기념 북한 공산당 양민대량학살의 증언' 이라는 이름을 달고 전시되어왔다.

    해마다 6·25를 전후해서 나는 지하철 시청역 광장을 지나면서 우울해진다.

    역사의 진실이 언제나 바로잡힐 것인지 아직도 아득해 보이기 때문이다.



    ● 1993. 6. 27 리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중 에서.

  6. 이승만의 업적은 공산주의를 저지한것이다. 만일 6.25전쟁에 공산화되었다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거지나라
    로 살게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공산주의를 미화하는 거짓선동에 미혹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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